CES 2026: 거북선이 라스베이거스에 상륙하다 - K-전력 기술의 글로벌 역습

프롤로그: 사막 한복판에 등장한 철갑선
라스베이거스. 화려한 네온사인과 카지노로 유명한 이 사막의 도시가 매년 1월이면 전 세계 기술 혁신의 중심지로 변신합니다. 2026년 1월 6일, CES 2026이 막을 올린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 한복판에서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영웅, **'거북선'**이 미래의 모습으로 재탄생하여 전시장 중앙을 차지한 것입니다.
한국전력공사(KEPCO)가 선보인 이 '미래 전기 거북선'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었습니다. 관람객들은 거북선 내부로 들어가 6.5분간의 몰입형 영상을 체험하며, 한국 전력 기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파격적인 전시는 CES 역사상 전력 유틸리티 기업이 단독 부스를 개설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며, 글로벌 에너지 산업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왜 지금, 왜 거북선인가?
거북선이라는 상징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6세기 이순신 장군이 설계한 거북선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철갑선으로,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현재 한국 전력 산업이 처한 상황은 이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재무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기술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송배전 효율과 운영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력망 신뢰도는 99.999%로 세계 최상위권이며, 정전 시간은 연간 10분 미만으로 선진국 중에서도 최고 수준입니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 전력 산업은 이제 노후화된 북미 전력망 시장과 글로벌 에너지 위기라는 새로운 '바다'를 향해 기술적 역습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CES 2026의 패러다임 전환: 에너지가 주인공이 되다
올해 CES의 공식 주제는 '혁신가들이 등장하다(Innovators Show Up)'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전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에너지'**였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생성형 AI의 폭발적 성장으로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슈나이더 일렉트릭의 분석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2년 460TWh에서 2026년 1,000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단일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소요되는 전력량은 일반 가정 100가구가 1년간 사용하는 전력량과 맞먹습니다.
동시에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에너지 전환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전력망은 더 이상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AI와 로보틱스, 모빌리티를 지탱하는 핵심 기술 플랫폼으로 격상되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기회가 열렸습니다.
한전의 전략적 파격: 유틸리티에서 솔루션 기업으로
한전의 CES 2026 참가는 단순한 기술 홍보를 넘어선 정체성의 전환을 선언하는 행위였습니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이번 전시가 한전이 전통적인 유틸리티 기업을 넘어 기술 중심의 비즈니스로 진화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전기를 단순히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을 넘어, 전력망 운영 데이터, 진단 알고리즘, 효율화 시스템 자체를 상품화하여 수출하겠다는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입니다. 실제로 한전은 이번 CES에서 발전부터 소비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9대 신기술'을 공개하며 이러한 변신을 구체화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의 이색 협업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국립중앙박물관과의 협업이었습니다. 기술 전시회에 문화 기관이 참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 이를 통해 한전은 기술적 우수성에 한국 전통문화의 매력을 더해 감성적 소구력을 극대화했습니다.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B2B 전력 시장에서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이만한 전략이 없었던 것입니다.
9대 신기술: K-전력의 실체를 들여다보다
한전이 공개한 9대 신기술은 CES 2026 혁신상 5관왕이라는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각 기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지능형 디지털 발전소 (IDPP)
발전소의 모든 설비를 디지털 트윈으로 구현하여 가상 공간에서 최적의 운전 조건을 시뮬레이션합니다. 고장 징후를 사전에 예측하여 불시 정지를 예방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발전소 비계획 정지는 수백억 원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기에, 이 기술의 가치는 실로 엄청납니다.
2. 송·변전 예방진단 솔루션 (SEDA)
변전 설비에 IoT 센서를 부착하여 실시간으로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합니다. 기존의 주기적 점검 방식에서 벗어나 상태 기반 정비로 전환함으로써, 설비 관리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고 전력망의 신뢰도를 높입니다. 마치 사람이 정기 건강검진 대신 웨어러블 기기로 24시간 건강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3. 차세대 배전망 관리 시스템 (ADMS)
태양광, 풍력 등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제어하는 기술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기능은 '자기 치유(Self-Healing)'입니다. 고장 발생 시 AI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고장 구간을 분리하고 건전 구간으로 전력을 우회 공급하여, 정전 피해를 최소화합니다.
4. 지중케이블 고장점 탐지 기술 (SFL)
서울 같은 대도시는 전력선의 약 70%가 땅속에 매설되어 있습니다. 케이블에 고장이 발생하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구간을 파헤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SFL은 고장 지점을 오차 범위 수 미터 이내로 정밀하게 탐지하여 복구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합니다.
5. 직류(DC) 배전 기술
가정의 거의 모든 전자기기는 직류(DC)로 작동하지만, 전력망은 교류(AC)로 공급됩니다. 매번 AC를 DC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10~15%의 전력 손실이 발생합니다. 직류 배전은 이러한 변환 손실을 없애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입니다. 특히 데이터센터나 전기차 충전소처럼 대용량 DC 부하가 집중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6.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기존 실리콘 태양전지보다 얇고 가벼우며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차세대 기술입니다. 한전은 이를 유리창호형(BIPV)으로 개발하여 건물 외벽이나 창문 자체가 전기를 생산하는 솔루션을 제시했습니다. 도심의 모든 건물이 발전소가 되는 미래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7. 1인 가구 안부 살핌 서비스
기술의 사회적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스마트 계량기 데이터를 분석하여 독거노인이나 1인 가구의 전력 사용 패턴에 이상이 감지되면(예: 장시간 사용량 '0') 복지 담당자에게 자동으로 알림을 보냅니다. 실제로 이 시스템을 통해 고독사를 예방한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민간 기업의 대공세: HD현대일렉트릭과 LS일렉트릭
한전이 공공 부문의 혁신을 이끌었다면, 민간 영역에서는 HD현대일렉트릭과 LS일렉트릭이 북미 전력 시장의 '슈퍼 사이클'을 기회로 삼아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HD현대일렉트릭: 765kV의 절대 강자
HD현대일렉트릭은 2026년 수주 목표를 42억 2,200만 달러(약 6조 원)로 설정했습니다. 이는 전년 대비 10.5% 상향된 수치입니다. 이러한 자신감의 배경에는 북미 초고압 변압기 시장에서의 독보적인 입지가 있습니다.
특히 765kV 초고압 변압기는 북미 전력망의 '동맥' 역할을 하는 핵심 설비인데, HD현대일렉트릭은 이 시장에서 압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CES 개막 당일인 1월 6일, 미국 유틸리티 기업과 983억 원 규모의 765kV 변압기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이를 증명했습니다.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미국 앨라배마 공장의 생산 능력을 연간 150대 수준으로 확장하고, 국내 울산 공장도 증설 중입니다. 또한 로봇 조립 공장(RMAC)을 가동하여 제조 혁신도 꾀하고 있습니다.
LS일렉트릭: HVDC로 미래를 선점하다
LS일렉트릭의 핵심 무기는 초고압 직류송전(HVDC) 기술입니다. 교류(AC) 송전에 비해 장거리 송전 시 손실이 적고, 재생에너지 연계에 유리한 차세대 기술입니다. LS일렉트릭은 GE 버노바와 협력하여 전압형 HVDC 변환 설비의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의 핵심 기술이기도 합니다. 서해안의 풍력 발전 단지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으로 효율적으로 송전하기 위해서는 HVDC가 필수적입니다.
또한 LS일렉트릭은 부산사업장에 1,008억 원을 투자하여 제2 생산 공장을 완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초고압 변압기 생산 능력을 연간 6,000억 원 규모로 3배 확대했습니다. CES 2026에서는 AI 기반 배전 관리 솔루션을 선보이며, 하드웨어 제조사를 넘어 소프트웨어 기반의 에너지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하려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미국은 왜 K-전력을 원하는가?
한국 기업들의 이러한 공세가 가능한 배경에는 미국 전력 시장의 구조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노후화의 덫
미국의 전력망은 대부분 1960~70년대에 구축되어 이미 설계 수명을 초과한 상태입니다. 2021년 텍사스 대정전 사태는 노후 전력망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미국 에너지부는 '그리드 현대화 이니셔티브'를 통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며, 이는 변압기, 케이블, 제어 시스템 등 전력 기자재의 엄청난 교체 수요를 의미합니다.
AI의 전력 블랙홀
ChatGPT 하나의 질의응답에 소요되는 전력은 구글 검색의 10배에 달합니다. 엔비디아의 최신 AI 칩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은 가정용 에어컨 수십 대를 동시에 가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은 데이터센터 건설에 수조 원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할 전력 인프라 확보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24시간 중단 없는 고품질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절실합니다. 한국의 고효율 변압기와 배전 기술은 바로 이 니즈를 정확히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검증된 품질과 납기
한국 기업들이 북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또 다른 이유는 '신뢰성'입니다. 지멘스나 GE 같은 글로벌 거인들도 존재하지만, 현재 이들의 생산 능력은 급증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빠른 납기와 일관된 품질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한번 납품한 고객은 재주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팀 코리아: 정부와 스타트업의 합창
이번 CES의 또 다른 특징은 '팀 코리아'의 입체적인 접근이었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의 통합 한국관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가 협력하여 38개 기관과 470여 개 기업이 참여하는 통합 한국관을 운영했습니다. 'K-Startup'이라는 단일 브랜드로 한국의 기술 생태계를 전 세계에 알렸으며, 이는 개별 기업의 진출을 넘어 국가 차원의 브랜딩 효과를 창출했습니다.
혁신상을 휩쓴 스타트업들
한국 스타트업들은 CES 2026 혁신상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전체 수상 기업 중 한국 기업의 비중은 약 59%(168개사)로 미국(54개), 중국(34개)을 크게 앞질렀습니다.
주목할 만한 수상 사례로는 딥러닝 기반 이상 행동 감지 솔루션(이화여대 캠퍼스타운), 해양 빅데이터 플랫폼(맵시), 핀테크 보안 솔루션(크로스허브) 등이 있습니다. 특히 AI, 디지털 헬스,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스타트업 생태계의 활성화는 대기업 중심의 전력 산업에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수혈하는 기반이 됩니다. 예를 들어 AI 기반 전력 수요 예측 스타트업이 한전의 ADMS와 결합된다면, 더욱 정교한 전력망 관리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도전과제: 순탄치만은 않은 항해
물론 앞날이 장밋빛만은 아닙니다. 한국 전력 산업이 넘어야 할 산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미·중 무역 갈등과 자국 우선주의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n)' 정책은 미국 내 생산을 강력히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도, 정치적 장벽 앞에서는 고전할 수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지 생산 거점 확대가 필수적입니다.
글로벌 거인들과의 경쟁
지멘스, GE 버노바, 슈나이더 일렉트릭 같은 기업들은 1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업계 공룡들입니다. 이들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컨설팅, 금융 솔루션까지 제공하는 토탈 솔루션 기업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단순히 변압기만 파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GE 버노바는 CES 2026에서 남부 캘리포니아 에디슨과 협력한 통합 ADMS-DERMS 솔루션을 선보였고, 슈나이더는 엔비디아와 AI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공동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도 하드웨어 경쟁력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 역량을 빠르게 보완하거나, 전략적 제휴(예: LS-GE 협력)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기술 인력 부족
전력 산업은 전기공학, 제어공학,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분야의 고급 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최근 젊은 세대는 전통 제조업보다 IT나 바이오 분야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장기적으로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인재 양성과 유입에 대한 투자가 필수적입니다.
에필로그: 거북선은 계속 항해한다
CES 2026에서 한국 전력 산업이 보여준 '거북선'의 퍼포먼스는 단순한 전시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술적 주권을 선언하는 방어적 상징인 동시에,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향한 공격적인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6세기 거북선이 왜군의 침략을 막아냈듯, 21세기 '미래 전기 거북선'은 에너지 위기라는 새로운 적을 상대로 기술적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전의 디지털 솔루션 전환, HD현대일렉트릭과 LS일렉트릭의 북미 시장 점유율 확대, 그리고 정부와 스타트업의 입체적인 지원은 '팀 코리아'가 글로벌 에너지 대전환의 파고를 넘을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미국의 노후 전력망 교체와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라는 '슈퍼 사이클'은 한국 기업들에게 다시 없을 기회입니다. 하지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옵니다. 한국 기업들은 단순한 기자재 수출을 넘어, 현지 생산 거점 확대, 글로벌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그리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결합된 토탈 솔루션 제공 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합니다.
CES 2026의 거북선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현재진행형의 혁신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기술적 모멘텀을 실제 수출 성과와 시장 지배력으로 연결하여, K-전력 기술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라스베이거스 사막에 상륙한 거북선의 항해는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기항지는 어디일까요? 아마도 세계 곳곳의 전력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K-전력 기술은 에너지의 미래를 새로 쓰고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CES 2026 현장 자료와 관련 산업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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